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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상담이야기) 프롤로그
2018-11-14 10:32:19
고도심리상담 조회수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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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의 남편

 

  내가 세상을 처음 구경한 것은 소금다라를 머리에 인 엄마의 등허리에 업혀서였다. 그리고 내가 처음 배운 명사와 동사로 이루어진 문장은 엄마가 목청껏 외치는 “소금 사세요.”였다. 그에 대한 덤으로 “안사요”라는 말도 함께 배웠다. “안사요” 소리를 유난히 많이 들었던 날이면 포대기도 헐거워지고 나를 추켜올릴 힘도 없는 엄마의 등허리에서 나는 미끄러져 떨어 질까봐 엄마 목덜미를 안간힘을 다해 붙들고 있어야 했다. 지친 엄마의 양손이 저녁이면 더욱 무거워지는 소금다라를 붙드느라 내 엉덩이를 받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엄마와 내가 사투를 벌이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아버지와 4명의 오빠, 언니는 엄마가 저녁을 차려줄 때까지 돌봄의 차례를 공손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가 그날 번 돈으로 저녁거리를 마련해서 연극무대가 바뀐 듯이 요리사로 변신하는 동안 나는 하루 종일 엄마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풀죽은 그들을 위해 인형을 등에 업고는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소금사세요”와 “안사요”라는 세상에서 배운 말들을 종알거리며 온 가족을 박장대소하게 했다. 내가 홍역을 앓는 며칠 동안 엄마는 장사를 쉬었다.

  이번에는 양손으로 든든하게 나를 받쳐서 업고 바람이 들어갈까 담요까지 씌워서 병원에 갔던 그 날, 기찻길 옆의 자갈 밟는 엄마의 발소리는 지금까지도 내겐 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파도소리 같다. 이러한 고단한 엄마의 삶을 심장의 고동소리로 느끼는 일상들은 언니들이 나를 돌볼 수 있을 만큼 내가 자랄 때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유년기의 기억들로 나는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로 보고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엄마의 고단한 외침들이 내 가슴에 꽝꽝 울려서인지 나는 아버지를 엄마의 남편, 엄마를 너무나 고생시키는 무능력한 그런 남편으로 생각을 고정시켜놓았다. 아주 오랜 동안 그랬었다.

  아버지는 부잣집 도련님으로 곱게 살다가 전쟁으로 25세에 피난 내려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병환으로 일을 놓기 전까지 아버지는 그래도 꽤 여러 가지 직업을 가졌었다. 경찰공무원이었다가 농협에도 다녔다가, 너무 박봉이어서 자식들 벌어먹이려면 장사가 좋겠다고 시작했다가 자본금만 날리고 접기도 수차례 하셨다. 어느 땐가 비 오는 날에는 종종 비옷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외출을 하시는 아버지에 대해 엄마한테 물었더니 미꾸라지를 잡으러 가신다고 하였다. 미꾸라지는 비올 때만 물 밖으로 나온다는데 그 약은 미꾸라지가 아버지 손에는 잡혀주지 않았는지 아버지는 그 일로도 돈을 벌지는 못하였다.

  그렇게 삶이 녹록치 않아서인지 아버지는 오랜 투병 끝에 지금의 내 나이보다 더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다. 이북에 계신 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어린아이처럼 웅얼거리신 애처로운 모습이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엄마는 그렇게 지독히도 자신을 고생시킨 아버지를 ‘군자적인 면모’를 가지셨다고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하며 험담 한 번 하지 않고 극진히 섬기고 존경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목 놓아 우셨다. 엄마는 자신의 삶을 신세한탄 하는 대신‘노루 피하면 범 만난다.’, ‘한 어깨에 두 짐 지랴 ~’라는 속담과 격언으로 스스로를 곧추세웠다.

  나는 아버지가 자식을 무릎에 앉히지 않던 아버지의 규칙을 내려놓고 여덟 번째로 태어난 막내인 나를 형제들 중 처음 무릎에 올리셨고, 돌아가실 때까지 늘 곁에 두고 싶어 하는 것을 나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16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그리고 이후로도 오랫동안 아버지를 회상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