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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뢰야식도입의 두 맥락

  • 고도심리상담
  • 2019-05-06 09: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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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賴耶識 도입의 두 맥락- 種子와 執受

 

1. 슈미트하우젠 도입문의 빛과 그림자

 

슈미트하우젠이 제시한 가설은 유가사지론의 삼마희다지에 보이는 멸진정과 관련된 알라야식 구절이 유가사지론에서 알라야식 개념을 최초로 도입하는 문장(이하 도입문)이라는 주장이다.

도입문 여부의 판단의 두 가지 해석학적 기준이란 다른 일체종자식이나 이숙식같은 유사 개념이 아니라 반드시 알라야식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이고 체계적인 교리적 맥락 해석학적인/이론적인 필연성 그 많은 이름 중에 알라야식이라는 이름을 붙인 작명상의 불가피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에 대한 슈미트하우젠 주장의 핵심내용은 멸진정에서의 색심호훈설이라는 교리적 맥락 속에서 식은 체를 떠날 수 없다는 이론적인 요청과 “...에 부착되거나 숨어 있는”으로 해석되는 “알라야”개념이 결합하여, 모든 심리현상(심과 심소)이 사라진 멸진정에서도 별도의 심리현상으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요가수행자의 물질적 감관(신체)에서 떠나지 않고, 감관에 “부착되거나 숨어있는” 형태로 존속하는 새로운 형태의 식이 구상될 수밖에 없었다고 보며, 본지분 삼마희다지의 구절이 바로 이러한 해석학적 기준을 모두 충족시키기에 유가사지론 전체에서 “알라야식” 개념을 최초로 도입하는 문장이라고 판정한 것이다.

이에 대한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슈미트하우젠의 문제점은 슈미트하우젠이 도입문 판정의 근거로 활용한 문헌 분석의 범위와 관련된 문제로 유관개념들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은 알라야식 형성의 또 다른 맥락을 시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슈미트하우젠이 설정한 연구범위의 인위성과 한계를 보여줌 본질적인 문제점은 텍스트의 층위란 개념인데 이는 문맥상의 일관성을 불신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이것이 극단적으로 심화될 경우 맥락은 사라지고 오직 문장”........“문장 단위의 집필자만이 남게 된다. 특정 문장을 알라야식의 도입문이라고 주장하게 될 경우, 심각한 작위성의 문제에 빠지게 된다. 알라야식 개념의 한 도입 맥락이라고 부르는 것이 해석학적인 오해나 비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이다.

 

이 글의 목적은 도입문도입맥락이라고 수정 전제 후, 도입문 판정의 기준에 어느 정도 부합되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며, 이 멸진정의 맥락에서 기존의 심식모델을 탈피하여 알아야식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식을 창출하도록 결정적으로 추동한 이론적(해석학적) 필연성은, “멸진정에서 살아있는 육신은 잠재적인 식이 통합, 유지, 관리해야 한다라는 초기유가행파의 멸진정 유심설에 기반하며, 이 배경에는 집수의 개념이 전제되어 있음을 논증하는 것이다. 이 집수라는 개념이 멸진정에서의 알라야식 도입의 필연적인 이론적 근거를 형성한다는 점은 슈미트하우젠에 의해 상당부분 간과된 부분이기도하며 이 육신을 콘트롤하는 식이 모든 식이 사라진 멸진정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존재해야만 할 때, 초기유가행파가 채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론적 탈출구는 요가수행자의 육신 속에 은장된 잠재적 식이라는 개념밖에는 없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 잠재식이 육식의 형태로서가 아니라 물질적 감관 속에 숨어 잠복하는 식의 존재 양태에 착목한 명명이었음을 해심밀경의 정의를 통해 재음미하고자 함

 

2. 해심밀경의 “아뢰야식” 정의에 대한 재검토

 

알라야식의 정의를 포함하는 해심밀경 심의식상품의 도입부문의 맥락을 정리하면 두 가지 집수의 기능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일체종자식이 감관과 신체를 구성하는 물질적인 요소를 회득, 유지하는 것이고 분별적인 관념에 탐닉함으로써 생긴 과거업의 정신적인 영향력을 획득, 유지하는 것인데 욕계와 색계에서는 이 일체종자심식의 두 가지 집수 기능이 다 유지되나, 모든 물질적인 요소가 사라진 무색계에서는 오직 정신적 습기의 집수만이 가능하다.

 

하르트무트 뷔셔의 주장

욕계로 재진입한 일체종자식이 왜 기존의 아비달마불교의 육식설을 전제로 한 경량부적 색심호훈설을 버리고 갑자기 잠재식으로 탈바꿈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교리적 이유로 간주하기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 이유는 아마도 알라야식이라는 개념이 다른 맥락, 예를 들어 이 일체종자식이 신체 속에 잠재하는 것 이외에는 존재방식이 허용되지 않는 멸진정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교리적으로 요청되고 구상된 이후에 그 개념 그대로가 일체종자식의 집수기능을 강조하는 해심밀경의 문맥에서 육신/전식과 구분되는 이 종자식이 가지는 잠재식, 무의식으로서의 측면을 강조하는 알라야식이라는 표현이 동의어로 첨가됨으로써 이 식에 대한 포괄적인 기술을 시도했다고 볼 때 해소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재기되는 또 다른 문제

집착이나 애착 또는 아집을 주로 의미했던 전통적인 알라야 개념의 주석전통에서 왜 갑자기 알라야의 무의식적 측면을 강조하는 주석이 등장했을까? 이에 대한 가설은 표층의식(육신)의 모든 활동이 소멸한 어떤 특정한 심리상태, 예를 들어 멸진정이나 무상정 같은 상황에서의 식의 존재상태가 이슈가 되는 상황이 이 개념의 형성 이전에 전제되었을 것이라는 것이어서 이런 식의 알라야식 정의는 필연적으로 멸진정에서의 식의 상태라는 교리적/실천 수행론적 맥락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인정된다. 멸진정에서의 식의 존재 상태를 문제 삼는다는 점은 슈미트하우젠의 선구적 통찰력이다.

3. 도입문이 전제하는 이론적 맥락; “생명의 유지”(執受)

 

“요가수행자가 왜 죽었다고 하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의 핵심은 “의식이 사라진 멸진정의 상태에서 수행자의 물질적인 생명이 유지되는 것은 왜인가?”라는 질문이며 이에 대한 답변 집수기능을 하는 은장된 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슈미트하우젠의 도입문에 보이는 알라야식에는 애초부터 독립적으로 존재, 유지될 수 있는 생리학적인 뉘앙스가 전혀 포함되어있지 않다고 보는데, 도입문의 문맥 자체는 멸진정에서 요가수행자의 신체를 관리, 유지하는 것은 식의 집수 기능 때문이라는 생리학적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고 있는데 이는 알라야식은 애초부터 독립적으로 존재, 유지 될 수 있는 형태의 식으로 구상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알라야식 자체가 물질적 토대를 필요로 하는 의존적인 존재인 것이며 이는 유가사지론에서 식과 명색의 상호 연기설이 이러한 생리학적(집수적) 관점에서 재해석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4. 몸을 통합, 유지하는 마음(집수의 개념)---논증의 목적

 

멸진정의 문맥에서 알라야식이 도입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교리적 이유는 슈미트하우젠이 주장하듯이 단지 멸진정에서의 식과 신의 불가분성을 강조하는 경문의 인용만으로는 불충분한데 도입문이 전제하는 이러한 집수의 맥락을 보기 위해서는, 유가사지론의 본지분이나 섭사분 등 소위 연대기적으로 최고층에 속하는 알라야식이 도입되기 이전의 층위들에서 몸과 마음의 관계에 대한 언급들을 검토해 보면 유가사지론에서 식은 살아있는 신체와 동반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신체를 통합, 유지, 관리하는 적극적인 집수의 기능을 담당하며 열반을 증득한 명상수행자가 살아 있는 한 그의 육신과 함께 존재한다. 또한 집수의 함의를 제대로 밝히기 위해서는 유관개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종자수반개념을 종자집수개념으로 치환하여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이 구절은 본지분의 최고층에 속하며 이 의미는 알라야식 개념이 형성되기 이전에 논의되었던 유가사지론의 종자설의 경우에도 수반개념은 단지 종자가 마음이나 몸에 동반하여 일어난다는 수동적인 개념이 아니고, 몸과 마음이 적극적으로 종자 즉 과거업의 영향력을 관리하고 조절하고 유지한다다는 집수의 의미이며 이는 집수의 개념이 도입문의 전반적 이론적 근거를 형성한다는 것이 논증의 목적이다.

 

5. 색심호훈설; 아뢰야식 형성의 교리적 맥락

 

슈미트하우젠의 경량부적 색심호훈설이외에 유가사지론 내에 알라야식의 색심호훈설적인 도입 맥락을 보다 명시적으로 시사하는 문장은 섭결택분에 나오는 종자설 관련된 문맥인 물질적 감관에는 마음과 그 심리현상의 종자가 수반되고, 이 종자가 원인이 되어 저 마음과 그 심리현상이 다시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는 슈미트하우젠 도입문과 유사한데 그 이유는 슈미트하우젠의 도입문에서 알라야식이 해야 할 일은 이 구절의 심, 심소의 종자가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구절 자체는 아직 알라야식이라는 개념을 상정한 흔적이 없으며 여전히 심신이원론적 모델에 근거하고 있지만 유가사지론 편집자의 입으로 알라야식 형성의 한 맥락이 상기의 멸진정에서의 색심호훈론적 종자설임을 시사고 있다. 즉 기존의 멸진정 유심설과는 다른 변형된 유형의 멸진정 유심설의 입장이 필연적으로 육식과는 대조되는 어떤 잠재적인 식의 존재를 전제하도록 만들며 그 결과물이 바로 감관 속에 부착되고 숨어 있는 알라야식개념이다.

 

6. “아뢰야식”이라는 명칭의 도입이유

 

일체종자식; 식이 종자를 포괄한다는 측면만을 강조한 것이며 이 잠재적인 식의 멸진정내에서의 존재 상태에 대해서는 어떠한 기술도 포함하고 있지 않아서 활동식과 대비되는 이 식 특유의 잠재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어 은장을 강조하는 알라야식이라는 신조어가 필요했을 것이다.

아다나식; 집수의 기능은 알라야식만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해심밀경의 생명의 탄생과정을 묘사하는 집수의 문맥이 강조될 때에는 아다나식이 전면에 등장하기도 하는데, 모든 심소가 사라진 멸진정에서 생명유지 기능을 하면서도 기존의 활동식과는 구분되는 잠재식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뭔가 새로운 이름이 필요했을 것이고 육식모델로부터의 질적인 비약을 위해서는 수평적 수축/집지모델이 아니라 수직적 섭수/은장모델이 필요했을 것이며 알라야식이란 말은 이"잠재성"의 특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작명으로 본다(잠재식만의 존재양태가 명확하게 표현되는 이름이 요청되었다)

 

7. 도입문을 넘어서

 

슈미트하우젠의 도입문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필연적 교리적/철학적 이유까지를 제시하지 못했다. 이는 육식과 완전히 다른 차원의 잠재식의 도입은, 멸진정에서도 육신의 생명은 식에 의해 유지된다는 집수의 사상과 이런 식은 잠재적 형태를 취해야 한다고 보는 유가행파의 변형된 멸진정 유심설이라는 이론적 전제가 개입될 때 설명이 가능해 진다.

슈미트하우젠은 경전적인 인용을 통해 이런 맥락을 암시하고는 있으나 이를 집수 개념이나 멸진정 유심설로까지 연결시키지는 않는다. 이는 슈미트하우젠 자신이 제시한 교리적 필연성을 확보해야한다는 해석학적 기준 중 첫 번째 기준을 충분히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이 기준에 맞추어 알라야식 도입의 이유를 정리해 보면 멸전정의 색심호훈설이라는 교리적 맥락 속에서 멸진정에서도 육신의 생명을 통합, 유지, 집수하는 것은 식이어야 한다는 집수의 사상과, 이식은 육식과는 다른 잠재식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는 변형된 멸진정 유심설이라는 이론적 전제와, 이를 명상체험을 통해 확증해 낸 초기유가행파의 학파적 정체성이 기존의 유사개념으로는 그 존재양태를 표현할 수 없었던 감관속에 잠복해 있는”(알라야)식이라는 새로운 명칭의 탄생으로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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